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677
한자 金弘壹
영어공식명칭 Kim Hong Il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박영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8년 9월 23일연표보기 - 김홍일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8년 9월 - 김홍일 중국으로 망명
활동 시기/일시 1920년 1월 - 김홍일 중국 귀주육군강무학교(貴州陸軍講武學校)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45년 4월 - 김홍일 한국광복군 참모장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49년 - 김홍일 육군사관학교 교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50년 - 김홍일 시흥지구 전투사령부 사령관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51년 - 김홍일 주 대만대사 취임
몰년 시기/일시 1980년 8월 8일연표보기 - 김홍일 사망
출생지 김홍일 출생지 - 평안북도 용천군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제2묘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지도보기
성격 군인
성별
대표 경력 참모장|대사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독립운동가이자 군인.

[활동 사항]

김홍일(金弘壹)[1898~1980]은 1898년 9월 23일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출생하였다. 오산중학교 졸업 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중국 군관학교에서 수학하기로 결심하고, 1918년 9월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20년 1월 중국 귀주육군강무학교(貴州陸軍講武學校)를 졸업한 후 중국 국민혁명군으로 중일전쟁에 참가하였고, 조선의용대 활동 및 1945년 4월에는 한국광복군 참모장을 맡았다.

1948년 한국군에 입대하면서 육군 준장에 임관되었으며, 1949년 육군사관학교의 교장직을 맡았다.

1950년 6월 25일 6·25전쟁 발발 당시 한국군은 38선상에서 전진 배치되어 있었고, 방어형 편성이 아니었다. 28일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되자, 채병덕 총참모장은 한강을 연한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시흥지구 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 김홍일을 임명하였다. 6월 28일 김홍일은 시흥 보병학교에 전투사령부 지휘소를 설치하고, 예하에 혼성사단들을 편성해 한강 남안에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당시 사령부가 하달한 명령에는 혼성제2사단은 신사리-이수교 정면 고수, 혼성제7사단은 동작동-대방동 정면 고수, 혼성수도사단은 신길동-양화교 정면 고수, 김포전투사령부는 현 위치에서 적을 저지, 특히 경인가도의 확보 등 구체적인 작전을 지시하였다. 한강선 방어전투는 7월 3일까지 6일간 진행되면서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켰다. 이 전투는 최초로 참전한 미 지상군 24사단이 도착하는 시간을 확보해 주었으며, 한미연합작전을 전개하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김홍일이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된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 독립운동을 하면서 중국군에서뿐만 아니라 한국광복군 참모장 등으로 작전을 구상하고 지도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1951년부터 1960년까지 주 대만대사를 역임하였고, 1960년대부터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저술 및 작품]

1972년 『대륙의 분노-노병의 회상기-』라는 회고록을 문조사에서 출판하였다.

[묘소]

김홍일은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제2묘역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51년 7월 26일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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