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6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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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甲成 |
이칭/별칭 | 연당(硏堂)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박우현 |
출생 시기/일시 | 1889년 10월 23일 - 이갑성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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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5년 - 이갑성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일 - 이갑성 3·1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 이갑성 1926년 YMCA 이사 |
활동 시기/일시 | 1950년 - 이갑성 제2대 민의원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53년 - 이갑성 자유당 최고위원 임명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이갑성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몰년 시기/일시 | 1981년 3월 25일 - 이갑성 사망 |
출생지 | 이갑성 출생지 - 경상도 대구부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183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민의원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독립운동가.
[개설]
이갑성(李甲成)[1889~1981]은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 대표로 3·1운동에 참여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가계]
[활동 사항]
이갑성은 1889년 10월 23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기독교에 귀의하였고 1915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최연소자로 독립운동을 함께할 학생단 조직에 앞장섰고, 3·1운동 직전에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역할을 했다.
이갑성은 민족대표들과 함께 태화관에 모이지 않고, 조선총독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역할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갑성은 1926년 YMCA 이사를 맡아 청년을 지도, 육성했다. 1931년 경성공업의 지배인을 지내다가 신간회 사건에 연루되면서 1933년 상해로 갔으나, 임시정부가 전 해에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멀리 떠나 이동 중이어서 귀국하였다. 귀국한 뒤 1938년 흥업구락부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7개월간 옥고를 치뤘다.
이갑성은 해방 후 독립촉성국민회 회장을 지냈으며 1950년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52년 10월 전시내각의 국무총리에 임명되었으나 다음 달 국회가 인준을 부결했다. 1953년 자유당 최고위원에 임명되었고,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자 정계에서 은퇴했다.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발기위원을 역임했다.
이갑성은 1981년 3월 25일 사망했다.
[저술 및 작품]
이갑성의 저술로는 「우리는 사회악에 항쟁한다」[『사상계』39, 1956]와 「3·1운동과 나」[『최고회의보』6, 1962]가 있다.
[묘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183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