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6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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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華英 |
이칭/별칭 | 국사(菊史),오하영(吳夏英),오화영(吳華永)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황민호 |
출생 시기/일시 | 1879년 4월 5일 - 오화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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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4년 8월 23일 - 오화영 집사목사 안수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12월 12일 - 오화영 협성신학교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일 - 오화영 민족대표로 3·1운동 참가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2월 15일 - 오화영 신간회 본부 간사 선출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5월 12일 - 오화영 사회영중앙실비진료원 원장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38년 5월 22일 - 오화영 투옥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9월 1일 - 오화영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초청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12월 12일 - 오화영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 선출 |
활동 시기/일시 | 1950년 5월 30일 - 오화영 제2대 민의원 당선 |
몰년 시기/일시 | 1960년 9월 2일 - 오화영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9년 - 오화영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출생지 | 오화영 출생지 -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대촌리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민족대표 33인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봉안된 독립운동가.
[개설]
오화영(吳華英)[1879~1960]은 3·1운동의 민족대표이며, 신간회운동과 흥업구락부사건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리고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 1950년 제2대 국회의원[민의원]으로도 당선된 정치가이다.
[가계]
본관은 고창(高敞)이며, 호는 국사(菊史), 이명으로는 오하영(吳夏英), 오화영(吳華永)을 사용하였다. 오석조(吳錫祚)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백부(伯父) 오석기(吳錫錡)에게 출계(出系)되었다.
[활동 사항]
오화영은 1879년 4월 5일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金岩面) 대촌리(垈村里)에서 태어났다. 고창 오씨가 대대로 살던 평산군 문무면(文武面) 물안리(物安里)에서 성장하였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익혔으며, 동학(東學)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1906년 개성북부교회에서 미국 남감리교회 선교사 크램(W.G. Cram)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1914년 8월 23일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7년 9월 서울 종교교회에 부담임 목사로 부임해 시무하였으며, 1918년 12월 12일 협성신학교를 6회로 졸업하였다.
1919년 2월 친구인 정춘수(鄭春洙) 목사로부터 3·1운동에 관한 소식을 듣고 2월 27일 이필주(李弼柱) 목사의 집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다음 날인 2월 28일에 독립선언서를 100부를 받아 개성 지역에 배포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3월 1일 태화관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에 참석한 후 피체(被逮)되었으며,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뒤 만기 출옥하였다.
1927년 2월 15일 개최된 신간회 창립대회에서 본부 간사 35명 중 1인으로 선출되었고, 이어 서무부장, 경성지회 검사위원에 선임되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12월 경 허헌(許憲), 홍명희(洪命熹), 조병옥(趙炳玉) 등과 함께 민중대회에 참석하려다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1931년 5월 12일 경성부 종로에 가난한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사회영중앙실비진료원(社會營中央實費診療院)을 개원하고 원장에 취임하였다. 1938년 5월 22일 흥업구락부사건으로 신흥우, 정춘수, 구자옥 등과 3번째로 구속되었다,
1945년 9월 1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초청되었으며, 12월 21일에는 신한민족당의 정치국 국장으로 임명되어 신탁통치반대 결의를 표명하였고 12월 30일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1946년 12월 1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에 피선되었다. 1947년 12월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했으며, 1950년 5월 30일 제2대 민의원으로 서울 종로구에서 당선되었으나 1950년 가을 6·25전쟁 중에 피랍되었다.
1956년 7월 2일 열린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에서 주석단의 1인으로 참석해 최고위원 3인 중 1인, 상무위원 11인 중 1인, 집행위원 29인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1960년 9월 2일 사망해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묘소]
오화영의 묘소는 북한 애국열사릉에 있으며, 1991년 11월 21일 서울특별시 동작구 서울국립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오화영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여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