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6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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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起鐸 |
영어공식명칭 | Yang Gi-tak |
이칭/별칭 | 의종(宜鍾),자명(子明),우강(雩崗),우강(于岡),우강인(于岡人),우강산인(于岡散人)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조은경 |
출생 시기/일시 | 1871년 4월 2일 - 양기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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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886년 - 양기탁 제중원 외국어학교에서 수학 |
활동 시기/일시 | 1896년 5월 - 양기탁 나가사키 상업학교 근무 |
활동 시기/일시 | 1897년 5월 - 양기탁 독립협회 가입 |
활동 시기/일시 | 1904년 7월 - 양기탁 『대한매일신보』 창간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양기탁 신민회 총감독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11년 - 양기탁 105인 사건으로 투옥 |
활동 시기/일시 | 1915년 12월 - 양기탁 대한광복회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7년 12월 - 양기탁 만주에서 동성한족생계회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1월 - 양기탁 국민대표회 남만촉성회 회장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8월 - 양기탁 통의부 결성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1월 - 양기탁 동우회 결성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12월 - 양기탁 만주농업사 결성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5월 - 양기탁 정의부 최고 고문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4월 - 양기탁 고려혁명당 창당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4월 - 양기탁 농업호조사 결성에 가담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12월 - 양기탁 한국독립당 가입 |
활동 시기/일시 | 1934년 1월 - 양기탁 상하이 임시정부 주석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7월 - 양기탁 민족혁명당 감찰위원 선임 |
몰년 시기/일시 | 1938년 4월 19일 - 양기탁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양기탁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8년 - 양기탁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묘역 안장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묘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독립운동가.
[개설]
양기탁(梁起鐸)[1871~1938]은 『대한매일신보』 창간, 신민회 결성 등 국권수호운동을 전개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가계]
양기탁은 평안남도 평양(平壤)에서 아버지 양시영(梁時英)과 어머니 인동 장씨 사이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활동 사항]
1886년 제중원(濟衆院) 외국어학교에서 6개월 간 수학했고 1892년부터 부친과 게일[T. S. Gale]의 『한영자전(韓英字典)』 편찬에 참여했다. 1896년 5월부터 1년 가량 나가사키[長崎] 상업학교에서 한국어 교사로 근무했다. 1897년 5월 귀국 후 독립협회에 가입해 총무급 직위에 임명되었다. 1904년 3월부터 1905년 11월까지 궁내부(宮內府) 소속 예식원(禮式院)의 번역관보(繙繹官補) 재직 중 1904년 7월 영국인 베델[Ernest Bethell]과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총관리인으로서 운영을 맡았다. 1907년 4월 대한매일신보사 내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만들어 의연금을 모금했고 안창호(安昌浩)와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 발기인 모임을 주재하며 신민회 총감독에 선임되었다. ‘105인 사건’으로 징역 6년을 선고받아 4년 여간 옥고를 치르다 1915년 2월 출옥했다.
1915년 12월 중국 베이징[北京]을 거쳐 펑톈성[奉天省] 류허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로 망명해 신채호와 대한광복회의 의열투쟁을 지도했다. 1917년 12월에는 재만 한인들의 생계 증진을 목적으로 동성한족생계회(東省韓族生計會)를 조직했다. 그러나 1918년 톈진[天津]에서 붙잡혀 국내로 압송되어 중국 재류금지 3년과 거주 제한처분을 받았다. 1920년 8월 남대문 정거장에 도착한 미 의원단에 독립청원서 전달을 시도했다.
1922년 1월 만주 망명 후 독립운동 단체 통합을 추진해 5월 펑톈성 환런현[桓仁縣]에서 결성된 국민대표회 남만촉성회(國民代表會南滿促成會)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8월에는 남만주 지역 독립군의 통합조직인 통의부(統義府) 결성을 주도하고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1924년 11월 남만주 군사단체를 망라한 독립군단 정의부(正義府)에서도 최고 고문을 맡았다. 1925년 5월 정의부, 신민부, 임시정부 측과 통합 논의 과정에서 조정 역할을 맡아 7월 정의부의 임시정부 참여 의결을 이끌어냈다. 재만 한인의 생활 안정에도 힘을 쏟아 1924년 1월 동우회(同友會)를 결성하고 12월에는 대규모 수전 농장인 만주농업사(滿洲農業社) 건립을, 1927년 4월에는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 결성에 가담했다.
1926년 2월 18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선임되었으나 취임을 거절하고 정당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세력 결집을 추진해 1926년 4월 5일 지린[吉林]에서 고려혁명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30년 12월 관내로 내려와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가입했다. 1933년 12월 전장[鎭江]에서 개최된 임시의정원 정기회의에서 국무위원에 선임되었고 1934년 1월 열린 국무회의에서는 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말에는 군무장도 겸했다. 항저우[杭州]에 한국독립당 사무소를 마련해 당의 재건에 힘쓰는 한편, 1935년 5월에는 한국독립당 이사장을 맡았다. 1935년 7월 창당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감찰위원에 선임되었으나 탈당하여 1937년 4월 하순 지청천 등과 새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을 창당하고 중앙위원이 되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장쑤성[江蘇省] 담양현에 있는 암자[길당암(吉堂庵)]로 은신 중 1938년 4월 19일 사망하였다.
[묘소]
1988년 5월 14일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묘역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