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647
한자 申乭石
이칭/별칭 신태호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장경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8년연표보기 - 신돌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6년 - 신돌석 의병 봉기
몰년 시기/일시 1908년 12월 12일연표보기 - 신돌석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신돌석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출생지 신돌석 출생지 - 경상북도 영해군 남면 북평리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지도보기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의병장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개항기 의병장.

[가계]

신돌석(申乭石)[1878~1908]의 본명은 신태호이다. 아버지는 신석주이고, 어머니는 김씨이다.

[활동 사항]

신돌석은 몰락한 향리의 후손으로 1878년 경상북도 영해군 남면 북평리에서 태어났다.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경복궁 점령사건 등 일본이 수도 서울의 중심부를 장악하게 되자 1896년 의병을 일으켰다. 영해의병진의 중군장이 된 신돌석은 김하락의 의진, 유시연 안동의진과 연합하여 대규모 연합 의진을 만들어 영덕관아를 공격했지만, 실패하였다.

신돌석이 활발히 활약했던 것은 1906년 4월이었다. 이 시기 영릉의진을 결성하였고 우선 영덕관아를 습격하여 무기고에서 무기와 화약을 확보하였다. 양양과 청송에서 자원을 확보한 후 울진과 삼척을 공격하였는데, 이 울진은 일본이 어업침탈을 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신돌석의 의진은 삼척의진과 연합하기도 하면서 여러 차례에 거쳐서 울진을 공략하였고 많은 일본인들을 사살하였다. 1907년 말 일본군은 보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군을 결성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일본군은 신돌석의 가족을 이용하여 회유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통하지 않았다.

1908년 8월 반복되는 일본군과의 전투로 신돌석 의진은 투항자 등으로 인해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신돌석은 만주로 가려고 했지만 1908년 12월 12일 영덕군 지품면 늘곡 황곡 상계에서 일본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묘소]

1971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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