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6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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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載弼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장경호 |
출생 시기/일시 | 1864년 1월 7일 - 서재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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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82년 - 서재필 별시 문과 급제 |
수학 시기/일시 | 1883년 - 서재필 일본 유학 |
활동 시기/일시 | 1885년 - 서재필 미국 망명 |
수학 시기/일시 | 1892년 - 서재필 콜럼비아대학 의학부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 서재필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 임명 |
수학 시기/일시 | 1926년 - 서재필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원 입학 |
몰년 시기/일시 | 1951년 1월 5일 - 서재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서재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출생지 | 서재필 출생지 - 전라남도 보성군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
성격 | 독립운동가|의사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독립운동가.
[가계]
서재필(徐載弼)[1864~1951]의 아버지는 서광언이며, 어머니는 성주 이씨이다. 이후 당숙인 서광하의 양자로 들어갔다.
[활동 사항]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났다. 1882년 별시 문과에 합격했다. 이어 1883년 일본에 유학하고 1884년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 천하로 끝나고 1885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888년 미국에서 시민권을 취득한 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도서관 사서로 근무, 1892년 컬럼비아대학 의학부[현재 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하였고, 의사생활을 시작하였다.
박영효의 적극적인 권유로 조선으로 돌아온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의회개설운동을 하는 등 민중계몽을 위해 힘썼다. 그러던 중 친러세력이 득세하여 친러세력과 갈등하던 서재필은 1897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1898년 미-스페인전쟁 당시 군의로 입대하였고, 제대 후에는 연구소에서 근무하였으며, 1904년에는 인쇄 문구 사업을 하였다. 사업에 열중하던 서재필이 다시 조국을 위해 일하게 된 것은 1918년이었다. 서재필은 한국의 소식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영문잡지 발간을 안창호에게 건의하였고,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필라델피아에서 이승만, 정한경과 함께 제1차 한인회의를 개최하였으며, 한국통신부 설치, 한국친우회 결성 등을 했다. 1921년에는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에 임명되었고, 임시정부로부터 워싱턴군축회의 한국대표단 부대표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워싱턴군축회의에는 한국문제는 다뤄지지 않았고, 서재필은 구미위원장을 사임하였다.
이후 1925년 범태평양회의에 고문으로 참석하여 호놀룰루로 가서 그곳 한인들의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1926년에는 다시 의학에 전념하여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원 특별학생으로 입학하였고, 여러 병원에서 근무하였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에는 징병검사 의무관으로 자원봉사하였다.
해방 이후에 내한하여 여러 차례 강연을 하였는데, 흥사단계 인물들이 서재필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고 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 1951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사망하였다.
[묘소]
1994년 4월 4일 미국에 있던 유해가 한국으로 봉환되었으며 4월 8일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한민국에서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