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625 |
---|---|
한자 | 姜宇奎 |
이칭/별칭 | 찬구,왈우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장경호 |
출생 시기/일시 | 1855년 - 강우규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강우규 사이토 저격 의거 |
몰년 시기/일시 | 1920년 - 강우규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1년 - 서울역에 강우규 동상 설립 |
출생지 | 강우규 출생지 -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의사(義士)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독립운동가.
[가계]
강우규(姜宇奎)[1855~1920]의 본관은 진주이다. 자는 찬구, 호는 왈우(曰愚)이다.
[활동 사항]
강우규는 1855년 7월 14일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에는 한약방에서 일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1908년 이동휘를 만나 기독교에 입문하였고 영명학교와 교회를 설립하는 등 각종 구국교육운동을 벌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병탄을 당한 이후인 1915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라오허현[繞河縣] 신흥동(新興洞)으로 이주하였다. 1917년 봄 신흥동에 광동학교를 설립하고 민족교육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신흥동에서 한인동포와 함께 독립운동에 가담하였고,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이라는 단체의 요하현 지부 책임자가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신임총독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강우규는 신임 총독을 처단할 생각을 가지고 경성으로 향했다. 1920년 9월 2일 경성 남대문 역에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이 탄 마차에 폭탄을 던졌다. 현장에 있던 신문기자, 경찰 등 37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2명은 며칠뒤에 사망하였으나, 사이토 마코토에게는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재차 거사를 계획하다가, 조선인 경찰 김태석의 불심검문으로 붙잡혔다.
1920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경성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 공소와 상고를 하였으나 기각되었다. 항소 이유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거사를 도와준 동지들을 변호하기 위함이었다.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강우규의 의거는 노령의 나이에 의거를 행했다는 것 뿐 아니라 3·1운동 이후 개인이 단독으로 감행한 의열투쟁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깊다.
[묘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현재 강우규가 폭탄 의거를 한 서울역[당시 남대문역] 앞에는 강우규의 동상이 남아 업적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