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618 |
---|---|
한자 | 盧公弼 |
영어공식명칭 | No Gongpil |
이칭/별칭 | 희량(希亮),국일재(菊逸齋),교성군(交城君),공편(恭褊)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우진 |
출생 시기/일시 | 1445년 - 노공필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462년 - 노공필 사마시(司馬試)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66년 - 노공필 춘시문과(春試文科) 급제, 성균관 직강(直講)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470년 - 노공필 예문관 교리(校理)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72년 - 노공필 예문관 부응교(副應敎)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75년 - 노공필 예문관 전한(典翰)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77년 - 노공필 예문관 부제학(副提學)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78년 - 노공필 이조참의(吏曹參議)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79년 - 노공필 동부승지(同副承旨) 임명, 우부승지(右副承旨) 승진 |
활동 시기/일시 | 1479년 - 노공필 파직 |
활동 시기/일시 | 1480년 - 노공필 병조참의(兵曹參議)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482년 - 노공필 도승지(都承旨)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489년 - 노공필 공조판서(工曹判書)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492년 - 노공필 예문관 대제학(大提學)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01년 - 노공필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03년 - 노공필 의정부 우찬성(右贊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04년 - 노공필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전라도 무장(茂長)에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506년 - 노공필 교성군(交城君)에 봉해지고 우찬성(右贊成)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07년 - 노공필 주문사(奏聞使)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08년 - 노공필 교성부원군(交城府院君)으로 진봉 |
몰년 시기/일시 | 1516년 - 노공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516년 - 노공필 ‘공편(恭褊)’이란 시호를 받음 |
출생지 | 출생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
부임|활동지 | 경기감영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영천동 |
유배|이배지 | 유배 - 전라북도 고창군 |
묘소|단소 | 묘소 -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
묘소|단소 | 이장지(移葬地) -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백석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교하(交河) |
대표 관직 | 우찬성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에 묘가 있었던 조선 전기 문신.
[개설]
증조부 시기부터 현재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 부근에 정자(亭子)를 짓고 선영을 마련한 교하 노씨의 일족이다. 노공필(盧公弼)[1445~1516]은 갑자사화(甲子士禍) 당시 과거 폐비 윤씨(廢妃尹氏)에게 사약을 내리는 교서를 전달했다는 죄로 유배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관작이 회복되었다. 이후 중종의 책봉을 위해 명나라에 다녀 온 공로로 공신에 책봉되고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516년 사망하여 일족이 묻힌 노량진의 선영에 안장되었다.
[가계]
노공필의 본관은 교하(交河)이고 자는 희량(希亮), 호는 국일재(菊逸齋)이다. 교성군(交城君)에 봉해졌으며 공편(恭褊)이란 시호를 받았다. 증조부는 세종 대 우의정 노한(盧閈), 조부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노물재(盧物栽), 아버지는 연산군 대 영의정인 노사신(盧思愼)이며, 어머니는 청주 경씨(淸州慶氏)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경유근(慶由謹)의 딸이다. 부인은 한산 이씨(韓山李氏)로 상례(相禮) 이숙(李塾)의 딸이며 아들 노섭(盧燮)은 사복시(司僕寺) 첨정(僉正)을 지냈다.
[활동 사항]
교하 노씨(交河盧氏)는 경기도 교하현(交河縣)[현재의 파주]에서 기원하나 노공필의 집안은 증조부 이래 현재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지역에 근거를 두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증조부 노한이 노량진 부근에서 어머니를 위해 복상(服喪)하고 효사정(孝思亭)이란 정자를 지었으며 조부와 아버지 역시 같은 지역에 안장되었기 때문이다.
1466년(세조 12) 춘시문과(春試文科)에 급제하여 출사한 이래 성균관과 예문관의 청요직을 거쳤고 1482년(성종 13)에는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다. 도승지로 재직 시 노공필은 성종이 폐비 윤씨(廢妃尹氏)에게 사약을 내리는 교서(敎書)를 전달하였는데 이 일로 인하여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 때 전라도 무장(茂長)[현재의 고창]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506년(중종 1) 반정(反正)으로 중종이 즉위하자 교성군(交城君)에 봉해지고 우찬성(右贊成)에 임명되었다. 1507년(중종 2)에는 주문사(奏聞使)로서 북경에 파견되어 정덕제(正德帝)로부터 권서국사(權署國事)의 칙지를 받고 귀국하였다. 그 공로로 노공필은 공신에 책봉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1514년(중종 9)에 중종에게서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1516년(중종 11)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묘소]
노공필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과 상도동의 경계 지역[당시 지명은 경기도 금천현 하북면 고사리]에 안장되었다가 1940년대 경기도 파주로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516년(중종 11) ‘공편(恭褊)’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