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6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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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太和 |
영어공식명칭 | Jeong Taehwa |
이칭/별칭 | 유춘(囿春),양파(陽坡),익헌(翼憲),충익(忠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우진 |
출생 시기/일시 | 1602년 - 정태화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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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24년 - 정태화 소과(小科) 진사시(進士試)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28년 - 정태화 별시문과(别試文科) 병과(丙科)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31년 - 정태화 시강(試講)에서 우등으로 선발되어 숙마(熟馬) 1필을 받음 |
활동 시기/일시 | 1636년 - 정태화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종사관(從事官)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37년 - 정태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보덕(輔德)에 제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심양(瀋陽)까지 수행 |
활동 시기/일시 | 1638년 - 정태화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40년 - 정태화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46년 - 정태화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49년 - 정태화 우의정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51년 - 정태화 영의정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58년 - 정태화 사직 |
활동 시기/일시 | 1659년 - 정태화 영의정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62년 - 정태화 진하겸진주사(進賀兼陳奏使)로 연경(燕京, 베이징) 파견 |
활동 시기/일시 | 1671년 - 정태화 기로소 입소 |
활동 시기/일시 | 1673년 - 정태화 중풍으로 사직 |
몰년 시기/일시 | 1673년 - 정태화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76년 - 정태화 현종(顯宗)의 묘정(廟廷)에 배향 |
부임|활동지 | 충청감영(忠淸監營) - 충청남도 공주 |
부임|활동지 | ‘정태화 충청감사 선정비’(鄭太和忠淸監司善政碑) - 충청남도 대전광역시 충남대학교 박물관 |
묘소|단소 | 동래 정씨 임당공파 묘역(東萊鄭氏林塘公派墓域) -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산32-2 |
사당|배향지 | 종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57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동래 |
대표 관직 | 영의정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개설]
정태화(鄭太和)[1602~1673]는 효종과 현종 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냈으며 남인과 서인 간의 갈등이 사화(士禍)로 비화하지 않도록 중재하였다.
[가계]
정태화의 5대조는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증조부는 좌의정 정유길(鄭惟吉), 조부는 좌의정 정창연(鄭昌衍), 아버지는 형조판서 정광성(鄭廣城)이며 어머니는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동생으로는 좌의정 정치화(鄭致和)와 예조참판 정만화(鄭萬和)가 있다.
[활동 사항]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지역에 세거(世居)하면서 여러 명의 정승과 판서를 배출한 동래 정씨(東萊鄭氏) 문중에서 1602년 태어났다. 1624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초임된 후 당하관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시문에 뛰어나서 1631년의 시강(試講)에서 우등으로 선발되었을 뿐 아니라 병자호란 시기에는 황해도의 패잔병들을 규합하여 항전하는 등 문무를 모두 갖추었다.
병자호란 후에는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심양(瀋陽)까지 수행하기도 하였다. 1638년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면서 당상관이 된 정태화는 육조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효종과 현종 2대에 걸쳐 약 30년 간 5차례나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인간관계가 원만하여, 효종 사후 벌어진 예송에서 남인과 서인의 첨예한 대립이 사화(士禍)로 비화되지 않도록 잘 조정했다는 후세의 평가를 받았다.
[학문과 저술]
시문집으로 『양파유고(陽坡遺稿)』 2권 2책과 효종 7년(1656년)까지의 일기인 『양파연기(陽坡年紀)』 2권 2책이 있다.
[묘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산32-2에 있는 동래 정씨 임당공파 묘역(東萊鄭氏林塘公派墓域)에 부인과 함께 안장되었다. 정태화의 고조부까지는 현재의 경기도 군포시에 선영이 있었으나 좌의정을 지낸 증조부 정유길(鄭惟吉) 이래로 수대에 걸쳐 정승을 비롯한 고관을 배출하게 되면서 도성과 비교적 가까운 관악산 자락에 묘역이 마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상훈과 추모]
1676년(숙종 2) 현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1680년(숙종 6) 익헌(翼憲)이란 시호가 내려졌다가 순종 대에 충익(忠翼)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