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3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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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오기승 |
[정의]
고려 시대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의 역사적 변천.
[개설]
고려 시대에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영역은 대방동, 신대방동, 상도동의 영역이 금주(衿州)에, 노량진동, 본동, 흑석동, 동작동, 사당동의 영역이 과주(果州)에 각각 속해 있었으며, 고려 전기 지방제도가 개편되는 과정에서 금주는 수주(樹州)의 속현으로, 과주는 광주목(廣州牧)의 속군으로 편제되었다. 두 지역 모두 초기에는 지방관이 따로 파견되지 않았으나, 고려 중기 이후 각지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어 지방관의 역할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금주, 과주에도 감무가 파견되었다. 문종 대에는 일시적으로 경기(京畿)에 속하였다가 이후 양광도(楊廣道)에 속하였으며, 고려 말 경기가 다시 확장되는 과정에서 금주, 과주 모두 경기의 영역으로 편제되었다.
[변천]
고려 건국 초기에는 신라 말의 명칭을 준용하여 금주는 곡양현(穀壤縣), 과주는 율진군(栗津郡)으로 불렸으며 곡양현은 율진군의 영현이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체제를 정비하면서 940년(태조 23) 3월 주(州)·부(府)·군(郡)·현(縣)의 이름을 고치게 하였고 이 때 처음으로 ‘금주’와 ‘과주’라는 명칭이 정해졌다. 성종 대에 당(唐)의 제도를 받아들여 지방 제도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995년(성종 14) 고려 영내를 10도(道)로 편제할 때 금주와 과주는 관내도[관내동도]의 영역에 포함되었으며, 이 중 금주에는 단련사(團練使)가 설치되었는데 1005년(목종 8) 단련사제도가 혁파되면서 금주단련사도 소멸하였다. 1018년(현종 9) 지방 제도를 다시 편제할 때 금주는 수주의 속현이 되고 과주는 광주목의 속군이 되었다. 이후 금주와 과주는 1069년(문종 23) 경기가 일시적으로 확장되었을 때 경기에 속하였다가 다시 양광도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는 1106년(예종 원년)부터 기존에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던 속군현에 감무를 파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금주에는 1172년(명종 2) 감무가 파견되었으며 과주 역시 명확한 시기는 확인되지 않으나 감무가 파견되었음을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려 말기인 1390년(공양왕 2)에는 경기를 문종 대와 비슷한 규모로 다시 확대 재편하여 이를 좌도와 우도로 나누었는데, 금주와 과주는 이 때 모두 경기좌도에 속하였다.
[환경 및 문화]
고려 후기의 문신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시에 따르면, 고려 시대의 금주는 작약(芍藥)과 해당화(海棠花)로 대표되는 봄 경치가 아름다우며 못물에 힘입어 주변의 토지가 기름지고 윤택한 환경으로 묘사된다. 또한 습속은 비록 중국의 제(齊)나라 땅과 같이 느슨하나 거주하는 백성들은 명랑하다고 평하고 있다.